공부/꽃이야기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기전에 공부해보는 오펜하이머 (맨해튼 계획)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운동하는직장인 2023. 8. 15. 13:58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12번째 장편 영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핵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원자폭탄을 개발한 역사에 대한 전기영화이다.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미국의 물리학자로, 세계최초의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 물리학자.

 

제2차 세계대전이 극으로 치닫으면서 일본은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함대를 기습하며 선제공격을 하게 되고

이후 미국과 일본의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는 미국 쪽으로 기울게 되는데

몇 번에 걸친 회담이 있었으나 일본은 항복요구를 거부해,

결국 핵무기가 실전투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작품으로 인해 사망한 것에

오펜하이머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고 전후 좌파, 평화주의 신념에 따라 수소폭탄 제조에 반대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결국 매카시즘(1950년대 초반 미국 전역을 휩쓴 공산주의자 색출 열풍: 전형적인 마녀사냥) 광풍

이후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모든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후두암에 걸려 생을 마감했다.

2022년에야 오펜하이머는 비로소 소련의 스파이라는 혐의를 모두 벗고 완전히 복권되었다.

 

 

맨해튼 계획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1942년 맨해튼 계획이 시작되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과학자들은 우라늄을 이용한 폭탄의 실현 가능성을 탐색하고,

농축 우라늄을 생산하는 시설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독일이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마침내 

루스벨트 대통령은 맨해튼 계획을 승인하고 육군이 프로젝트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때 애국심에 불타던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계획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중성자(전하가 중성인 핵자)

에 관련된 계산을 수행하였다.

 

오펜하이머는 원자폭탄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누구보다 충분한 상황이었지만,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포함된 거대

연구진을 이끌기에는 경력이 부족하고공산주의자라는 의심까지 받고 있었다

맨해튼 계획이 군계획이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당시 형식적으로 중령 계급을 받았고

심지어는 체력 검사도 받아야만 했다.

그로브스가 프로젝트 전체에 필요한 인력과 예산, 자원의 관리를 맡았다면 오펜하이머는

직접 핵무기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의 최고 책임자 역할을 하였다.

결국 미국은 이들이 개발한 원폭으로 일본제국을 항복시키고태평양 전쟁을 끝낸다.

하지만 이때 핵공격을 받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에 대해 회의론자로 돌아서게 되었다.

 

종전 후 맨해튼 계획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오펜하이머 역시 언론에 노출되기 시작하였고, 이 새로운 과학무기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특히 엄청난 살상력을 지닌 수소폭탄을 극렬히 반대하였다.

초기의 수소폭탄 컨셉은 폰 노이만

울람의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결과 실제 핵융합을 일으킬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고,

이 기회를 틈타 오펜하이머는 일반 자문 위원회 의장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수소폭탄 연구를 최대한 방해하였다.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고 곧 수소폭탄도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고 있던 오펜하이머는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1953년 12월 비밀정보접근 권한을 빼앗겼다.

미국에서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므로, 미국 정부는 그의 명예를 실추시킬 목적으로 이른바 '오펜하이머 사건'

때마침 일어난 광신적인 매카시즘 속에서 유발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빨갱이로 몰리고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자신이 만든 핵폭발의 위력을 여과없이 목격한 오펜하이머는 이후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한다.

이후 혼자서 백악관까지 가서 1인으로 핵무기 탄원서에 관련된 시위를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OPPENHEIMER - New Hindi Trailer (Universal Pictures) - HD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AdtLxlttrHg&t=2s 

'"The ending of the war by this means, certainly cruel, was not undertaken lightly. But I am not, as of today, confident that a better course was then open. I have not a very good answer to this question."

확실히 잔인한 이 수단에 의한 전쟁의 종식은 가볍게 착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 현재로서는 더 나은 길이 열렸는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좋은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1965년 CBS 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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